세계화가 이루어진 지금, 다양한 네트워크와 교역망, 교역 수단을 통해서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들이 대륙에 상륙한 이후로는 유럽의 국가들이 힘을 가지게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로 넘어가며 중국의 영향력은 약화되었고, 식민지배를 받기도 하였다. 지금은 패권국으로 자리매김한 중국이 과거에 이 시기를 앞당길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다. 명의 3대 황제, 영락제 시기의 정화의 항해가 그 전환점이었다.

기린도

이 그림은 명나라 시기에 그려진 ‘기린도’이다. 이 그림을 그린 서예가 심도는 당대에 명필로 손꼽혔다. 그림 속에는 소말리아 지역에 있었던 ‘아주란 술탄국’에 있던 기린이 담겨 있다. 1414년에 중국의 총사령관 정화는 선단을 이끌고 벵골을 다녀갔는데, 당시 술탄이 공물로 바친 것이 그 원인이다. 자금성 내의 사람들은 마치 중국 고대 전설 속 동물인 ‘기린’과 유사하다고 느꼈기에 관심을 주었다.

그렇다면 이 항해를 이끈 정화는 누구일까? 당시 원나라에 거주하던 무슬림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영락제가 원나라 세력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붙잡혀 거세되고 만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은 정화는 영락제가 왕권을 굳히는데 큰 공을 세우며 신임받는 환관으로 거듭난다.

영락제는 1405년 정화에게 함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설 것을 명한다. 이후 28년간 일곱 번의 항해를 나서며 베트남, 말레이시아, 사우디아라비아를 거쳐 동아프리카까지 도달한다. 1~3차에는 인도 서남부 지역과, 47차에는 페르시아만 입구인 호르무즈 해협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별동대의 일부 선박은 아프리카 동쪽 해안과 홍해 연안까지 항해한 기록이 있다. 그 당시 세계에서는 최대 규모로, 60여 척의 선단에 2만 명 이상의 승무원이 참여하였다.

이처럼 거대한 대규모 원정의 의도는 항해를 통해 주변 국가들과 교역국들에 명의 강력한 군사력을 보이고, 외교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도에는 다른 의견도 존재한다. 전 황제이자 조카인 건문제를 추적하려는 의도, 해외 국가들로부터의 안정적인 조공체제를 확립할 의도, 해상 무역을 장려할 의도 등, 여러 설명이 뒤따르기도 한다. 정확히 하나의 이유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앞서 이야기한 모든 이유가 얽혀있는 결정일 수도 있다.

정화의 함대는 외교적으로 중대한 임무를 더러 수행했다. 여러 국가들과 조공 관계를 맺어 실크로드를 구축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후 실크로드는 외교사절단이 오가고, 공물이 중국으로 편리하게 이동될 수 있도록 하는 등, 중국 뿐만이 아닌 세계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종교적으로는 관용을 베풀었다. 실론에는 불교 건축물을 지었으며 말라카에는 중국인 무슬림 집단을 이주시켰다. 또한 인도양 연안에는 화교 모임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 항해 이후 해당 국가에 대한 많은 정보가 중국에 유입되며 지식이 축적되었다.

그러나 1433년, 정화는 마지막 항해를 마쳤다. 영락제 사후 즉위한 홍희제는 대양 항해를 엄격히 금지하고 선박을 파괴했으며, 심지어 원정 기록도 없애려했다. 중국은 이후 해금 정책으로 돌아섰다. 영락제의 통치를 지켜본 왕족들은 실익이 없는 항해에 많은 자원을 사용하는 것을 막고, 자국민의 거주지를 넓히며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두려워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베이징에 근간을 두고 있는 세력이 해안가의 상인 집단과 그들과 연관된 환관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라는 지적도 있다.

다시 돌아가며, 만약 정화의 함대를 계승한 중국의 대규모 선단과 스페인, 포르투갈의 함대가 마주쳤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졌을까? 세계사는 아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패권을 유럽에 넘겨주게 된 아쉬운 사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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